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에는 명나라 황제를 위해 조선 후기에 세운 사당이 있다.
이자성의 난으로 이미 오래 전에 멸망한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1563~1620년)와 의종 숭정제(1611~1644년)의 제사를 지내려고 만든 만동묘다.
만력제는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보냈고 숭정제는 마지막 명나라 황제다.
숭정제는 명장 원숭환을 질투심에 처형하고 부정부패를 일삼다가 반란군에 쫓기자 자식들을 손수 죽이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명나라 멸망을 초래한 혼군인데도 조선에서 수백 년 간 추앙받는 아이러니가 생긴 것은 주자학 신봉자인 송시열의 유언 때문이다.
송시열은 괴산군 화양리에 서원 등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다 사사될 때 만력제와 숭정제의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지내라는 말을 남겼다.
화양동은 솔맹이(松面里)라는 곳에 정착하면서 바꾼 이름이다. 중화(華)의 따뜻한 햇살(陽)이 비치는 골짜기(洞)라는 뜻으로 작명했다.
권상하는 스승인 송시열의 사후 14년 만인 1703년 지역 유생들과 함께 만동묘를 조성해 매년 두 차례 제사지냈다.
송시열은 청에 사신으로 파견된 민정중이 구한 의종의 ‘비례부동’ 친필을 얻자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그 글을 화양리 절벽에 새기고 원본은 운학각에 보관했다.
의종의 친필임을 뒷받침하는 아무런 증거도 없었는데도 신주처럼 모셨다.
선조가 재조지은의 의미로 경기도 가평군 조종암에 새긴 ‘만절필동’을 모방해서 화양리 절벽에도 같은 글씨를 남겼다.
황하의 구비가 아무리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만절필동은 조선에서 뜻이 바뀌어 중국에 대한 영원한 충성을 의미했다.만동묘는 만절필동의 첫 글자와 끝 글자를 취해서 지어졌다.
만동묘로 올라가는 돌계단은 경사 70도로 가파르게 조성했다. 소중화 나라의 백성이 중국 천자를 알현하려면 개처럼 기어 오르내려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청은 만동묘의 존재를 알고 조선 사신에게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때 사신은 "재가한 과부가 사별한 남편에게 제사지내는 것처럼 조선도 명을 그렇게 대할 뿐입니다. 청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답변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조선 국왕들도 만동묘 제사를 적극 지원했다. 영조는 만동묘에 제전과 노비를 내려주고 90명을 배치해 묘우를 지키도록 했다.
1744년에는 충청도 관찰사에게 묘우를 중수토록 하고 화양리 토지 20결을 면세전으로 삼아 제전에 쓰도록 했다.
정조는 어필로 사액하고 순조는 묘우를 헐고 새로 지었다. 헌종은 봄가을에 한 번씩 관찰사가 제사지내도록 했다.
만동묘는 임금의 지원 등에 힘입어 나중에는 일종의 성지로 여겨져 온갖 폐단을 드러냈다.
군역이나 노역을 빼주는 조건으로 주민들로부터 제사 명목으로 돈을 거두고 할당 비용을 내지 못하는 백성은 때리거나 죽였다.
그럼에도 어느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천자국인 중국 황제를 섬긴 덕에 살인면허를 받은 것이었다.
당시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상(삼정승), 삼상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노래가 퍼졌을 정도로 만동묘의 위세는 대단했다.
흥선대원군이 젊은 시절 만동묘를 참배하려다가 묘지기에게 수모를 당했다는 야사도 있다.
유생들은 만동묘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해 중앙 정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그 폐단이 서원보다 훨씬 심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1865년 만동묘의 지방과 편액을 서울의 대보단으로 옮겨 황제 제사를 일원화했다. 그 결과 만동묘는 철폐됐다.
하지만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유림들의 상소로 만동묘는 복원된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겨 일제 통감부의 내정 간섭을 받았을 때는 만동묘가 기구한 운명을 맞는다.
일제는 잡다한 예제를 정비한다는 명목으로 ‘향사이정(享祀釐整)’을 제정해 대부분 국가 제사를 없애거나 축소했다.
화양리 환장암과 운한각을 불태우고 만동묘는 철폐해 귀속 재산을 국가로 환수했다.
그럼에도 일부 유림이 제사를 몰래 지내며 중국 숭배 사상을 이어갔으나 1940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비밀 제향마저 중단되고 만다.
1942년에는 재조지은 목적으로 세운 만동묘정비의 글자를 모두 지워버리고 만동묘 건물을 불태워버렸다. 비석은 땅에 묻었다.
만동묘 건물의 목재와 석재는 괴산경찰서 청천면 주재소를 짓는 데 사용했다.
1704년에는 서울 종로구 창덕궁 후원에 돌 구조물이 설치된다. 임진왜란 당시 원병을 보낸 명나라의 은혜를 기리기 위한 제단이다.
정방형 제단의 한쪽 길이는 7.5m이고 높이는 1.5m였다. 바닥과 단 사이에는 네 개 계단을 만들었다.
제사는 매연 한 차례 지냈다. 중국 왕이 정기 동순하던 2월 중에 하루를 택했다.
임금의 친제가 원칙이었지만 중병 등 불가피한 때는 정2품 이상 중신이 대제했다.
황우를 잡아 올리고 나머지 제물과 기구는 문묘의 예법을 따랐다.
대보단 설치는 실익보다 부작용이 훨씬 컸지만 계획대로 진행됐다.
삼전도 치욕을 씻으려면 대명절의를 강화하고 청에 대한 보복을 다짐할 필요가 있다는 데 왕과 대신이 공감한 결과다.
1704년 정승들이 신종 사당 건립을 제안했을 때만 해도 숙종은 신중했다.
유교 예법으로는 제후의 천자 제사가 부적절하기 때문이었다.
명나라 황위를 계승하지 않았고 황실과 혈연관계도 없는 제후가 황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유교 질서에 어긋났다.
황제 사당을 세우면 제후격인 조선 왕들의 신위가 있는 종묘보다 우대해야 한다는 점도 난제였다.
천자 신위를 모시는 건물은 종묘보다 격을 높이고 제향도 웅장해야 하는데 그렇게 조성할 형편이 못됐다.
황제 사당 소식이 청에 알려졌을 때 생기는 외교적 부담도 걱정됐다. 청은 사당을 없애라고 요구할게 뻔했다.
이런 부작용을 의식한 숙종은 사당 건립 논의를 중단시켰다.
이후 조선 조정은 사당 대신에 제단 건립으로 급선회한다. 제천과 체제에서 묘안을 찾았기 때문이다.
제단을 만들어 제사지내는 제천의식을 따른다면 제후가 천자 제사를 지내도 무방하다고 판단했다.
천자는 제후에게 하늘같은 존재이므로 천자 제사를 하늘 제사와 동일시한 것이다.
왕의 뿌리를 찾아 제사지내는 체제에 비춰 봐도 제단 제사는 무방하다고 결론 냈다.
체제는 묘우나 신주 없이 신패만 설치했다가 제사 후 불태우는 방식이다.
하늘 제사는 둥근 언덕이라는 원구단에 신위를 모시고 지내는 것이어서 사당 제사와 달랐다.
사당은 벽과 지붕으로 둘러싸인 폐쇄 공간으로 제향뿐 아니라 신위를 보관한 장소다.
반면, 땅을 돋운 곳에 설치하는 네모나 둥근 모양의 제단은 벽이나 지붕이 없다.
신위는 제사 때만 모시고 평소에는 별도 장소에 보관한다.
단에는 신이 상주하지 않고 제향 때만 강림한다는 생각에서다.
영의정 이여는 체제를 본받아 명나라 신종의 신위를 만들지 말고 제사 당일 지방을 써서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숙종은 제천 제단과 체제 지방 형식을 수용해 신종 제사를 지내도록 결론짓는다.
제단만 설치하면 청의 항의나 종묘와 차별화 문제를 없앨 수 있다고 판단한 결과다.
서울 도심에 속국 조선의 비애가 서린 곳이 있다.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중국식 건축물 동묘가 그 현장이다.
만동묘·대보단과 함께 조선의 사대주의가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물 3종세트의 하나다.
동묘는 3세기 무렵 위·촉·오 삼국을 이끈 조조와 유비, 손권이 중국 패권전쟁을 벌일 당시 촉나라의 명장 관우(?∼219)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동묘의 공식 이름은 동관왕묘다. 유비와 장비의 의형제인 관왕(관우)을 모신 동쪽 사당이라는 뜻이다.
적토마에 올라 청룡언월도를 휘둘렀다는 관우는 중국에서 12세기까지 무(武)와 충(忠), 의리(義理), 재물(財物)의 화신으로 추앙받았다.
송나라 말기부터는 신선으로 격상됐다. 대제(大帝)로도 추앙받았다.
조선에 관우 사당이 처음 세워진 것은 임진왜란 무렵이다.
1599년 울산성을 점령한 왜군과 싸우다 총탄에 맞은 명나라 장수 유격과 진인을 서울로 옮겨 치료할 때 숭례문 밖 산기슭에 세운 사당이 최초 사례다.
명나라 장수들과 조선 조정이 함께 은을 출연해서 세운 남묘다.
사당이 완성되자 선조와 문무백관이 참배한 것을 계기로 제사가 정례화 했다.
이후 명나라 황제 만력제(신종)가 친필 현판과 건축자금을 조선 국왕에게 보내면서 관우 사당을 제대로 지어라고 명령한다.
임진왜란 당시 평양성과 행주산성 등에서 장수와 군사들에게 관우 신령이 나타나 대승을 거뒀다는 얘기를 듣고 사당을 건립토록 했다.
이에 조선은 남묘와 별도로 동대문 밖에 1601년 100여 칸 규모의 사당을 짓는다.
숙종 이후 왕들은 능행길에 동묘에 들러 어김없이 참배했다. 명나라 사신들에게도 동묘 참배가 관행이 됐다.
여진족 국가인 후금에 망한 명을 기리는 조선의 사대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관우 사당은 전국으로 확산한다.
전라도 강진과 남원, 경북 안동과 성주 등지에 관왕묘가 설립돼 매년 음력 5월13일(관우 생일)에 제사를 지냈다.
국가 차원의 관우 신격화 작업은 민간에도 큰 영향을 미쳐 무속신앙과 결부됐다.
관우를 담은 무속화 등이 유행하고 민간 사당이 건립됐다. 서울 중구 청계천변의 성제묘가 그 사례다.
그 안에는 턱수염을 쓰다듬는 붉은 얼굴의 관우가 부인과 나란히 앉아 있는 무속화가 걸려 있다.
1920년대에는 관우 숭배 사상을 반영한 관성교라는 종교까지 탄생했다.
조선 말기에는 관우 숭상 열기가 더욱 고조돼 한양 서쪽과 북쪽에도 관왕묘를 설립했다.
한양 동서남북 4곳에 건축된 관왕묘 가운데 동관왕묘가 제일 크고 화려하다.
대표 조각상인 금동제 관우신상은 구리 4000여 근(약 2.4t)을 들여 만든 높이 2.5m의 거작이다.
조선은 서울 사방을 호위하는 관우의 힘을 빌려 영토를 지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머잖아 일제에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고 만다. 관우의 신통력이 전혀 발휘되지 않았던 것이다.
관우 제사는 조선 패망 무렵인 순종 대에 사라진다. 국력이 쇠약해져 나라를 꾸릴 형편도 안 되는 상황에서 제사는 너무 벅차다는 이유로 전국의 모든 관제묘 제사를 없앤 것이다.
그럼에도 중화사상과 주자학 절대주의 악습은 오늘날까지 남아서 정치권을 타락시키고 있다.
일제시대는 물론, 해방 이후 주요 인물에게 친일이나 독재 부역자,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여 매도하는 방식이 그 사례다.
인간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사문난적 흉기’를 휘둘러 정적을 제압하는 악행의 변종이다.
중국 유학의 원조인 공자가 라이벌인 묵자와 치열한 학문 경쟁을 통해 기존 사상의 한계와 단점을 보완하며 발전한 것과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묵자가 겸애설 중심의 묵가 사상을 발전시키자 위기의식을 느낀 유가 진영이 방어벽을 치는 과정에서 맹자와 순자라는 걸출한 인물을 탄생시켰다.
묵자와 치열한 사상 논쟁을 벌이면서 진화한 공자 사상은 맹자와 순자를 거치면서 더욱 발전해 한나라에서 사상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위진 남북조와 수당 시대에는 각각 불교와 도교를 상대로 사상 경쟁을 벌이며 상대 경전의 장점을 수용해서 유교 이론을 더욱 탄탄하게 다졌다.
중국 유가가 묵가 등의 신랄한 공격을 받으며 꾸준히 발전한 것과 달리 조선은 주희를 신격화하면서 어떠한 도전도 용납하지 않은 탓에 망국의 길을 재촉하게 된다.
주자학 절대론은 오늘날 북한 수령의 유일지도체제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유일 수령은 무오류하고 완전한 지도자이므로 개인숭배가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