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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2차대전 끝자락에 한반도 지배야욕을 재점화했다.

중국은 청일전쟁(1894~1895년) 패배로 조선이 속국체제에서 풀려났음에도 한반도 지배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중국은 조선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과 한동안 공존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종주권을 회복할 기회를 엿봤다.
잇따른 전쟁 패배와 열강의 경제침탈로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탓에 예전처럼 주먹을 마구 휘두를 처지는 아니었다.
온순해진 듯했던 중국의 실체를 확인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반기에 연합군이 승기를 잡자 중국은 한동안 감췄던 표독한 이빨과 발톱을 조선을 향해 다시 드러냈다.
사냥 방식은 과거보다 훨씬 세련되고 교활해졌다. 좀비 상태에서 간신히 원기를 회복한 데다 한반도로 남하하던 소련이 경쟁 사냥꾼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중국이 자국에서 활동하던 대한민국 광복군을 지원하는가 하면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가 돕도록 주선하겠다는 호의를 보인 것은 달라진 국내외 정세를 의식한 꼼수였다.
일곱 마리 새끼 염소를 잡아먹으려고 검은색 발에 밀가루를 발라 엄마 염소로 위장한 늑대의 술책과 유사했다.
한반도를 차지하려는 흑심은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들통 났다. 식민지 한국의 독립 문제를 강대국 정상들이 처음 논의한 국제회담에서다.
당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처칠 영국 총리,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 등 3명은 한국의 독립을 명시한 카이로선언문을 발표했다.
1910년 일제의 합병이후 하마터면 국제사회에서 잊힐 뻔 했던 한국에 수십 개 식민지 중 유일하게 독립을 보장해주는 행운을 안긴 선언문이다.
장개석은 선언문에 한국 독립 문구가 들어간 것은 자신의 공로라고 생색냈지만 그 의도는 매우 불순했다. 한국을 다시 지배하려는 욕심에서 한국 독립 문제를 다뤘다.
장개석이 카이로선언문에 한국 독립 문구를 넣도록 한 실제 주역인지도 의심스럽다. 그의 주장과 상반되는 미국 정부의 문서와 회고록 등이 뒤늦게 공개됐기 때문이다.
카이로 정상회담에서 한국 독립 문제가 논의된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공식 문서는 없다.
회담 관계자들이 각자 기억을 토대로 작성한 일기와 회담 준비 문서, 루스벨트 대통령의 전언 등만 남았다.
문제는 중국과 미국 측 기록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카이로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보장한 주인공이 누구냐를 놓고 논란이 이어졌다.
장개석과 루스벨트가 한국 독립을 지지하도록 영향을 미친 주체를 놓고도 견해가 갈렸다.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장개석에게 한국 독립을 요청해 성공했다는 주장과 이승만이 다양한 외교활동을 통해 루스벨트를 움직였다는 설이 평행선을 달린다.
카이로회담 당시 미국이 한국의 신탁통치를 암시하는 문구를 선언문에 삽입한 것은 중국의 한반도 지배 야욕을 의식한 조치였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물론, 미국도 한반도에 대한 종주국 지위를 되찾으려는 장개석의 욕심을 충분히 간파했다.
다만, 중국이 1937년 중일전쟁 패전 이후 일본의 반식민지로 전락한데다 공산당 세력과 내전을 치르느라 만신창이가 된 탓에 한국 지배 야욕이 좌절됐다.

 

카이로선언문의 ‘한국 독립 보장’을 장개석이 주도?

중국과 대만, 한국 임시정부 기록을 보면 카이로선언문에 ‘한국 독립’ 문구를 넣도록 한 주인공은 장개석이다.
장개석은 1943년 11월 23일 부인 송미령과 함께 이집트 카이로에 도착해 루스벨트 숙소에서 비공식 만찬을 할 당시 한국 독립 문제를 거론해서 합의했다고 일기에 적었다.
일본이 청일전쟁 이후 점령한 만주·대만·팽호도 등을 중국에 반환하고 일제가 패망하면 한국의 자유 독립국 지위를 인정하자고 제안해서 루스벨트가 동의했다는 내용이다.
중화민국(대만)이 카이로회담을 앞두고 정리한 회담 제안 문건에도 한국의 자유 독립 항목이 포함됐다.
대만 국민당이 1981년 펴낸 외교문서에는 중국의 카이로회담 의제 초안과 장개석의 비서장 왕총혜가 남긴 회담일지가 실려 있다.
의제 초안에는 일본의 항복 이후 취할 첫째 조치로 중국 영토 회복을 명시하고 두 번째로 한국의 전후 독립 보증을 제시했다.
일본의 항복 조건으로는 중국의 영토 반환과 한국의 독립을 내걸었다. 국방 최고위 비서청 문건도 한국 독립을 정치 부문 첫머리에서 언급했다.
그 내용은 “중국, 미국, 영국, 소련이 즉시 조선 독립을 공동이나 개별적으로 승인하거나 전후 한국 독립을 보장하는 선언을 한다.”는 것이었다.
왕총혜의 회담일지에는 카이로선언문 초안에서 한국 독립 문구를 빼자는 영국의 카도간 외무차관에 맞서 자신이 지켜냈다는 내용이 담겼다.
카도간이 영국 식민지인 인도의 독립을 의식해서 한국 관련 조항을 없애자고 하자 왕총혜는 “일본의 중국 대륙 정책은 조선 병탄에서 비롯됐다.”고 항변하며 원안을 고수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러한 기록들을 내세워 한국 독립 문구가 카이로선언에서 삭제될 위기를 자국이 막아줬다고 자랑한다.
1956년 대만 정부가 미국 국무부에 건넨 루스벨트-장제스 회담 기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루스벨트가 한국과 인도차이나 등의 장래 지위에 대한 이해를 중국과 미국이 공유하자고 했을 때 장개석은 동의하면서 한국에 독립을 부여할 필요성을 강조했다.”라고 적혀 있다.

 

장개석의 한국 독립 주장에 임시정부가 영향력 행사?
장개석은 카이로회담에서 자국 이익을 챙기느라 정신없었을 텐데도 한국 독립 보장을 관철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구를 수용한 결과라는 분석이 있다.
김구 주석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중국과 미국 정상 회동 소식을 4개월 전에 듣고 한국 독립 문제를 의제로 삼아달라고 부탁해서 긍정 답변을 받은 것으로 임정 기록은 전한다.
임정 요인들은 “미국과 영국의 국제공동관리 주장에 현혹되지 말고 한국 독립을 관철시켜 달라.”고 요청했고, 장개석은 “한국의 완전 독립을 돕겠다. 어려움이 있겠지만 힘써 싸우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이후 장개석은 카이로회담에서 루스벨트에게 한국 독립 문제를 꺼내 선언문에 반영한 것으로 임정 요인들은 믿었다.
김구는 1944년 6월 장개석이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의 독립 필요성을 주창하는 등 다양한 지원을 해준데 사의를 표하기도 했다.
김구는 "동맹국 승리를 눈앞에 둔 지금 우리의 임무가 더욱 막중함을 느낀다."며 지속적인 도움도 요청했다.
장개석의 일기는 임정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일기에 처음 적은 카이로회담 협의 항목에 한국 독립 문구가 빠졌으나 김구와 회동한 1943년 7월 이후에는 자주 등장했다.
임정은 1919년 4월 수립부터 1945년 11월 귀국까지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정부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장개석은 1945년 11월 김구가 환국할 때 전별금 20만 달러를 줄 정도로 두 사람은 가까웠다.
당시 중국은 일본군과 공산당군을 상대로 2개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느라 심각한 재정난을 겪었다는 점에서 20만 달러는 적잖은 돈이었다. 중국은 1919년 상하이에 첫 둥지를 튼 임정이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여러 도시로 옮길 때마다 재정 지원을 했다.
임정이 중국에서 27년간 활동하면서 국민당정부에 보낸 서한 중 약 70%가 광복군 지원 등과 같은 돈 문제였을 정도로 임정의 중국 의존도가 높았다.

 

루스벨트 신탁통치는 중국·소련의 한반도 지배 방지 목적
카이로회담(11월22일~26일)과 테헤란회담(11월28~12월1)이 1943년 연말에 불과 며칠 간격으로 다른 나라에서 열린 것은 중국과 소련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이었다.
루스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조기 종식과 전후 국제질서 재편을 위해 1942년 10월부터 미국과 영국, 소련, 중국을 아우르는 4개국 정상회담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 장개석과 스탈린을 별도로 먼저 만나는 양자회담을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번번이 좌절됐다.
장개석은 일본과 소련의 동맹관계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스탈린을 만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중국 공산화와 병탄을 기도한 소련에 대한 경계심도 거절 이유였다.
스탈린은 전쟁을 지휘해야 하는 상황에서 소련을 떠날 수 없다며 루스벨트의 회동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과 영국, 중국 정상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먼저 만나고 곧바로 이란 테헤란에서 중국 대신 소련이 참가하는 3자 회동이 성사된다.
루스벨트는 카이로 본회담에 앞서 장개석을 숙소로 초대해 약 3시간 동안 만찬을 하며 3가지 사안에 합의했다.
만주·대만·팽호도의 중국 반환, 일본이 강점한 태평양 영토 해방, 조선 독립과 중국내 일본 산업의 중국 접수 등이었다.
루스벨트는 만찬회동에 동석한 해리 홉킨스 특별보좌관에게 합의 사항을 토대로 선언문 초안을 작성토록 했다.
당시 만찬 결과를 두고 장개석과 루스벨트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장개석은 이날 회동으로 매우 기뻤다고 일기에 적었다.
루스벨트는 장개석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가 실망했다. 다음날 아침 침대에서 식사하던 루스벨트에게 아들인 앨리엇 무관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자 즉답을 피한 채 흥분한 어투로 “많은 일이 있었다.”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했다.
장개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루스벨트는 어깨만 으쓱했다고 한다.
루스벨트는 만찬회동의 통역을 담당한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에게는 악감정을 품었다. 평소 그를 가리켜 기회주의자라고 칭했다.
루스벨트가 불만을 품은 원인은 다음날 발언을 통해 추론할 수 있다.
그는 11월24일 처칠이 참석한 미·영 연합참모회의에서 장개석을 성토했다.
“중국이 만주와 한반도 재점령을 포함한 광범한 야망을 가진 게 틀림없다."라고 불평한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한국 독립을 선언서에 담기로 합의했지만 장개석의 의도는 매우 불순한 것으로 의심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11월 25일 장개석과 비공식 회동을 한 다음에는 앨리엇 무관에게 "장개석 군대는 전혀 싸우지 않는다. 신문 보도와 달리 말이다."라고 불만을 터트렸다.
일본군 소탕은 뒷전이고 중국 공산당을 겨냥해 본토 서북 지역에 대규모 군대를 배치한 데 대한 불만인 듯하다.
카이로선언문은 만찬 회동에 배석한 백악관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가 초안을 작성하고 루스벨트와 처칠 등을 거치며 최소 5차례 수정됐으나 골격은 유지됐다.
초안에는 “조선 인민을 기만하는 예속에 유의하고 일본의 항복 후 최대한 빠른 시점에 조선의 자유 독립을 3개국이 결의했다.”라는 구절을 담았다. 식민지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가 처음으로 보장하는 문구다.
이런 성과를 낸 데는 루스벨트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미국 국무부 문서와 앨리엇 회고록이 전한다.
루스벨트가 한국 독립에 적극적이었던데 반해 장개석의 태도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이었다는 것이다.
루스벨트가 카이로선언문 초안의 한국 독립 관련 문구를 직접 수정한 것은 중국의 흑심을 의식한 조치였다.
한국 독립 시기와 관련해서 ‘가능한 한 최단기간에(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를 ‘적당한 시기(at the proper moment)’로 고쳤다.
해당 초안은 처칠한테 넘어가 다시 수정된다. ‘적당한 시기’가 ‘적당한 절차(in due course)’로 변경됐다.
루스벨트는 일본 패망 후 국제사회의 한국 신탁통치를 염두에 두고 적당한 시기를 선언문에 넣었다.
미국은 중국과 소련이 한반도 지배권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는 상황을 막으려고 미국· 영국·중국·소련 4개국의 신탁통치를 구상했다. 중국과 소련은 외몽고와 만주 반환 문제를 놓고 이미 격돌한 상태였다.
외몽고는 1911년 신해혁명 이후 한족 지배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소련이 1921년 군대를 보내 괴뢰정부를 세운 곳이다.
장개석은 외몽고를 소련과 중국이 분할하되 만주는 독점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루스벨트는 만주와 외몽고를 둘러싼 중·소의 갈등이 한반도로 확산할 것으로 우려했다.
소련이 일본과 가까운 부산을 노린다고 미국 군부가 경고했기 때문이다. 소련이 부산과 대련으로 연결되는 통신망과 항구를 손아귀에 넣으려 한다는 첩보도 있었다.
루스벨트는 중·소의 한반도 지배 야욕을 이미 1942년부터 인지했다. 충칭 임시정부가 해당 사실을 가우스 주중 미국 대사에게 알려줬다.
중국은 일본 패망 후 종래의 한반도 종주권을 요구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루스벨트는 이런 상황에서 특정 국가의 한국 지배를 막으려면 여러 국가를 끌어들여 한국 지배의 국제화를 꾀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적당한 시기라는 문구를 카이로선언문에 손수 넣은 이유다.
1945년 7월17~8월2일 포츠담 회담을 위한 미국 국무부 보고서에도 비슷한 시각이 담겼다.
“중국·소련과 국경을 접하는 한국은 극동 평화와 안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미국과 중국 소련 중 어느 일방이 독점하기를 원치 않는다.“
한반도에 대한 단일 국가의 지배는 심각한 결과를 야기할 것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경고였다.
루스벨트의 신탁통치 구상에는 한국인의 자치능력도 감안됐다.
그는 피식민 상태로 자치능력을 장기간 상실한 국가에 해방과 함께 독립을 허용하면 사회·경제·정치 혼란이 극심해져 다시 외부 지배를 받을 것으로 우려했다
자생력이 없는 독립은 국가 혼란만 초래한 채 결국 남에게 먹힌다는 그의 생각은 확고했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해방과 동시에 독립한 상당수 국가가 극심한 혼란 끝에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겪었다는 점에서 그의 걱정은 기우만은 아니었다.
미국이 1882년 한국과 수교한 이래 한반도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카이로회담에서 많은 관심을 표명한 데는 새로운 태평양전략 의 영향도 컸다.
미국은 1차,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자국 호수로 편입한 태평양을 지키는데 한반도 안보가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한반도 불안을 계기로 강대국들이 간섭한다면 미국의 태평양 안전이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43년 카이로선언문은 이러한 고민의 연장선에서 도출됐다. 한국의 안전과 태평양 안보가 조화를 이루도록 선언문을 설계한 것이다.
3국 정상이 합의한 선언문은 11월30일 테헤란회담에서 스탈린의 동의를 받음으로써 12월1일 공표될 수 있었다.
중국이 카이로회담에서 건진 진짜 성과물은 한국 독립이 아니라 청일전쟁(1894~1895년)이래 일본에 빼앗긴 만주·대만·팽호도 반환이었다.
세계 경찰국가 대열에 동참하게 된 것도 소득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패퇴를 거듭한 중국이 졸지에 미국·영국·소련의 강대국 반열에 오른 것이다.

 

카이로회담 앞두고 루스벨트를 움직인 주역은 이승만?
루스벨트와 홉킨스가 한국 독립 조항을 카이로선언문 초안에 넣은 주역이고 이승만이 이들에게 영향력을 미쳤다고 유영익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분석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장기간 벌인 외교활동이 카이로에서 결실을 거뒀다는 주장이다.
이승만은 박용만이나 김구의 무장투쟁노선과 일정 거리를 둔 채 강대국 미국의 힘을 빌려 일본을 물리치자는 외교 노력을 일관되게 고수했다.
그렇다고 무장투쟁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미국의 승인을 받는다면 대일본 선전포고와 함께 참전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국제적으로 공인된 합법정부로서 참전해야만 전쟁 중은 물론 전후에도 일본과 대등한 위상을 갖는다는 판단에서다.
카이로선언에 대한 이승만의 역할을 주장하는 측은 루스벨트라는 이름의 미국 대통령 2명과 이승만의 각별한 인연에 주목했다.
이승만이 1905년 고종의 밀사로 미국에 파견돼 만난 대통령은 데오도어 루스벨트다. 그때 이승만은 1882년 맺은 조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을 거론하며 일본 침략을 막아달라고 루스벨트에게 호소했다.
미국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직후여서 이런 노력은 헛수고에 그쳤다.
이승만은 1933년부터 집권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부부에게도 끈질기게 접근했다.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도움을 받기 위해서다.
미국이 조미조약을 파기해서 을사조약과 강제합병이 허용된 만큼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한국만이 일본 팽창주의를 저지할 수 있다.”라고 적은 편지도 보냈다.
백악관 외교팀의 실력자인 섬너 웰즈에게도 미국의 배신 역사를 알리면서 한국 독립 지원을 압박했다.
웰즈는 전국 규모 신문인 신디케이트에 쓴 기고문을 통해 화답했다.
“한국이 독립하면 미국이 저지른 20세기 최대의 죄악 중 하나가 청산되고 새로운 태평양 국제질서에 한국이라는 안정요소가 추가될 것이다.”
태평양 안정 요소란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 시절부터 줄기차게 주장해온 한국 독립의 세계적 중요성을 설득할 때 활용한 논리였다.
조미조약을 어겨가며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한국을 희생시킨 미국의 죄의식을 널리 일깨운 이승만의 외교 노력이 카이로회담에서 성과를 낸 것으로 유영익 전 위원장은 분석했다.
특히 진주만 급습으로 미국조차 일본에 배신당한 워싱턴 정치 지도자들의 기독교적 양심과 속죄 본능에 불을 지른 이승만의 심리전이 효과를 봤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루스벨트 부인인 엘리노어와 친분을 쌓아 다양한 요청을 백악관에 전달하는 창구로 활용했다.
한국군의 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 대여도 엘리노어를 통해 루스벨트에게 전달했다.
미국의 유력 정치인이 참여하는 한미협의회를 조직한 것도 이승만이었다.
그는 오래 다닌 교회 목사이자 연방 상원의원 원목인 해리스 목사를 이 협회의 이사장으로 내세워 친한 여론 형성에 활용했다.
루스벨트가 한국에 처음 관심을 보인 시점은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인 1942년 2월 23일이다.
그때 라디오 연설문을 통해 일본의 가혹한 압제를 당하는 한국인에게 동정을 표시했다.
루스벨트가 식민지 한국에 관심을 표명한 것은 1941년 6월 일본내막기(Japan Out Inside)를 쓴 이승만의 외교 노력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 침공 가능성을 경고한 이 책이 나온 지 수개월 뒤인 1941년 12월7일 진주만이 공격을 당했다.
이승만은 이 책을 백악관 핵심 참모들과 스팀슨 육군장관, 헐 국무장관 등 정계 요로에 보냈다. 루스벨트도 일본내막기를 받았다고 자신의 회고록에 적었다.

 

중국 한국 독립 지원의 속내는 재점령 야욕
장개석이 카이로회담에서 한국 독립 문제를 주도했다는 주장의 진위는 가리기 힘들다.
회담 과정을 현장에서 기록한 공식 문서가 없는데다 기억에 의존한 중국과 미국 관계자들의 일기 등의 내용이 상이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회담 수개월 전에 한국 독립 의지를 이미 피력했다는 점에서는 카이로선언문을 누가 주도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루스벨트는 1943년 5월 미국에서 장개석의 부인인 송미령과 만나 한국 독립을 보장하되 미국과 중국, 소련이 공동 관리하기로 합의했다. 이 사실은 장개석에게 전달됐다.
당시 송미령은 장개석의 비선 특보 역할을 하면서 미중 정상간 가교역할을 했다.
장개석은 중요한 대미 외교활동을 벌일 때 주미 중국 대사관보다 송미령에게 훨씬 많이 의존했다.
이런 상황에서 카이로 만찬회동에서 한국 독립 문제가 다뤄졌다면 누가 먼저 거론했는지에 무관하게 선언문에 쉽게 반영됐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장개석은 한국 독립이라는 문구에 공감했음에도 속내는 루스벨트와 크게 달랐다.
루스벨트는 일정기간 신탁통치를 거쳐 한국의 독립을 보장할 계획이었던데 반해 중국은 한반도에 대한 자국의 종주권을 되찾으려고 했다.
한반도 지배 야욕은 신라대학의 배경한 전 교수가 확보한 1940년대 중화민국(대만) 외교 문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 문서를 보면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중국이 한국에 군대를 주둔시켜 영향력을 행사할 계획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장개석 정부는 1944년 10월 전후 한국 문제 처리와 관련해 국방부와 외교부 등의 의견을 수렴했다.
국방부는 전쟁이 끝나 연합국 군대가 한반도에 진주할 때 중국군도 같이 들어가 한강 이북에 주둔하고 영국·미국 군대는 한강 이남에 배치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중국군과 영·미군의 병력 비율은 4:1:1로 제시했다.
신설 한국군은 중국의 지원을 받아온 광복군을 중심으로 편성하고 한반도 진공작전은 중국군이 주도해야 한다는 방안도 마련했다.
당시 영국 주재 고유균 중국 대사는 한국의 외교·국방을 중국이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군의 항복 후 한국 임시정부를 구성할 때 외교·국방·경찰 고문을 중국인이 맡아야 한다는 제언이었다.
위도명 주미 대사는 1944년 11월 중순 본국에 보낸 의견서에서 충칭 임시정부와 중국내 한국 교포를 통한 한반도 우회지배 전략을 제시했다.
"충칭 임정의 한국 독립당을 중국이 돕는다면 해방 후 통일정권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동북지역에 거주하던 한국 교포 약 100만 명을 귀국시킬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구상은 일본 패망 후 중국 내전과 미·소의 분할 점령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중국은 한국 지배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친중 인물을 한국 권력층에 심고 우수 청년들을 중국에 유학시켜 미래 지도자로 키워야 한다는 장기 계획을 1945년 12월에 마련했다.
남로당 중앙위원으로서 해방신문 주필로 활동한 이승엽이 1947년 작성한 ‘남조선 정세’ 보고서에도 당시 중국의 야욕이 기록됐다.
“중국 영사는 김구 등의 도움을 받아서 남조선에 대한 중국의 지배를 확립하고자 백방으로 애쓰고 있다”
임정의 조소앙 외교부장은 장개석의 흑심을 중국 주재 고스 미국 대사에게 털어놨다.
고스의 비밀 전문에는 “중국의 한국 임시정부 불승인 이유를 조소앙에게 물었더니 일본 패전 후 자국의 속국으로 삼으려는 욕망 때문일 것이라고 답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장개석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거부한 채 광복군 통제에 집착한 것도 한반도 지배 전략의 일환이었다.
광복군은 중국 대륙을 침략한 일제에 맞서 중국군과 항일연대를 결성하기 위해 1940년 9월 창설됐다.
하지만 광복군은 독자적인 무장투쟁을 하는데 큰 제약을 받았다. 중국 군대에 편입돼 참모장과 정훈차장 등 요직을 중국인이 맡은 탓에 작전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1941년 광복군 9개 행동강령을 만들어 훈련과 활동을 엄격히 통제했다. 광복군의 자유로운 독립투쟁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강령 제1항은 “항일작전 기간에 광복군은 중국군에 예속돼 참모장이 군 운용을 장악한다.”라고 규정했다.
이에 지청천 광복군 총사령관을 비롯한 수뇌부는 치욕적인 처사라며 크게 반발했다.
임정 군무부장 조성환은 중국의 소액 원조 때문에 종속된다면 광복군은 우리의 독립운동을 되레 말살하는 꼴이 된다고 개탄했다.
강령을 수용하면 광복군은 독립군이 아니라 중국의 노예 군대로 전락한다는 성토도 나왔다.
김구는 이런 현실을 고려해 미국으로 임정을 옮기는 방안을 염두에 두고 이승만과 연락하면서 강령 취소를 장개석에게 요구했으나 끝내 거부됐다.
임정은 광복군 유지와 재정 확보가 절실한 상황이어서 결국 강령을 수용하게 된다.
강령은 1945년 4월 폐기되지만 광복군 훈련과 유지 등은 여전히 중국군의 통제를 받아야만 했다.
광복군은 당초 3개 사단 구축을 목표로 창설됐으나 해방 당시 전체 병력이 기껏 500명 안팎에 그치고 활동이 변변찮았다. 이렇게 된 데는 중국 통제의 영향이 컸다.
실제로 김구는 독자적인 한반도 진공작전을 추진하려다가 모든 군대의 감독·지휘권은 중국 정부에 있다는 장개석 정권의 경고로 무산된 바 있다.
광복군은 강령에 얽매인 탓에 항일전쟁은커녕 중국군 정보원이나 정훈병 역할만 수행했다.
미국 전략정보국(OSS)의 도움으로 특수 첩보훈련을 받은 것이 최대 군사 활동이었다.
장개석이 한중연대를 외쳤지만 정작 한국 독립에는 매우 부정적이었다는 사실은 임정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임정을 대한민국이 아닌 한독당의 정부로 지칭하면서 승인 요구를 번번이 거절했다. 심지어 1945년 8월 해방 이후에도 인정하지 않았다.
장개석은 한국을 자국 위성국 또는 속국으로 삼거나 아예 중국에 편입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임정을 끝내 승인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임정이 승인됐더라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전후 처리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장개석의 야욕과 몽니는 한반도 운명에 치명타였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9개국은 임시정부 형태로 연합군에 가담해 종전 이후 국제무대에서 독자 목소리를 냈다.
해방 이후에는 중국은 물론, 미국마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아 임정 요원들이 개별 자격으로 귀국했고 새로운 국제질서를 설계하는 샌프란시스코 강화협상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 협상에는 미국과 영국 등 강대국은 물론, 캄보디아와 라오스, 필리핀, 스리랑카, 레바논,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아이티, 에콰도르 등 51개국이 참가해 자국 이익을 관철했다.
중국과 미국 문서, 임정 요인들의 증언 등을 종합하면 장개석이 카이로회담에서 언급한 한국 독립은 단순한 레토릭이었다.
그의 실제 야심은 수 천 년 간 한반도를 속령으로 취급한 청일전쟁 이전 질서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비록 장개석의 열망이 달성되지 않았지만 끝내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 중국몽에 영향을 미쳤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3년 집권 1기부터 줄기차게 언급해온 중국몽은 강력한 외교 등을 통해 국제 사회에서 패권국 지위를 되찾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