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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6.25 침략을 정의로운 ‘항미원조’로 날조

중국은 한국전 참전을 침략자 미국에 맞서 싸운 정의의 전쟁’(항미원조전쟁)이라고 선전한다.

김일성이 중국·소련의 지원 약속을 받아 남침한 사실이 비밀문서 공개로 밝혀졌음에도 중국은 그릇된 역사관을 수정하기는커녕 되레 강화하고 있다.

한국전쟁 70주년인 2020년에는 중공군의 활약상을 부풀려 홍보하는 영화와 드라마를 잇따라 상영함으로써 사회주의 우월성과 애국사상을 고취했다.

방탄소년단(BTS)밴 플리트 상수상 소감에서 한국전쟁 70주년을 언급했을 때는 중국 네티즌이 벌떼공격을 퍼부었다. 항미원조 전쟁 70주년의 고귀한 정신을 모욕했다는 이유에서다.

시진핑 국가주석도 참전 70주년 기념대회에서 6.25전쟁을 항미원조라고 스스럼없이 날조했다.

항미원조는 제국주의 침략 확장을 억제한 것은 물론, 중국 인민의 평화로운 삶을 수호하고 한반도를 안정시켰으며 아시아와 세계 평화를 지켰다는 궤변도 늘어놓았다.

250만 명이 죽고 전체 가옥의 절반이 파괴된 전쟁을 사실상 주도한 전범국의 최고 지도자가 범죄 역사를 앞장서서 조작하고 미화한 것이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에 대한 뒤틀린 경계의식과 확증편향에서 비롯된 항미원조의 허구성을 입증하는 증거와 정황은 차고 넘친다.

 

중공군 40만명 전사에도 위대한 승리로 자랑

한국전쟁은 19506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돼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뻔했다.

중국은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에 맞서 연인원 100만 명을 투입해 29개월간 싸웠다.

중공군은 북한에 전세가 유리했던 시기에는 출병 태세만 갖추고 별 반응을 하지 않다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참전 의지를 굳혔다.

전쟁 이전에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참전한다고 김일성에게 약속한 데다 북한의 긴급 지원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유엔군의 38선 돌파 직전에 전쟁 개입 가능성을 경고한 뒤 20일도 안 돼 참전했다.

당시 유엔군의 대처는 안이했다. 중국이 엄포만 놓을 뿐 실제로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무작정 북진에 나섰다.

중공군은 치밀한 준비 끝에 참전한 상태였다. 투입 병력은 초기에만 30만 명 수준이었다.

중공군 제4야전군 소속 18만 명이 19501019일 압록강을 건넌 데 이어 11월 초순에는 제3야전군 예하 12만 명이 추가로 참전했다.

유엔 공군의 감시망을 피해 험준한 산악지대를 따라 하룻밤에 약 30km를 행군하고 낮에는 참호를 파고 휴식을 취하는 식으로 주요 거점에 잠입했다.

참전 초기에는 주로 게릴라전을 활용했다. 깊은 산속에 매복했다가 야간에 기습하는 방식이었다. 승기를 잡고도 완전히 섬멸하지 않은 채 퇴각하기도 했다.

미군의 장단점을 파악하려는 속셈에서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이를 눈치채지 못한 채 더욱 대담한 작전을 펴다가 수시로 덫에 걸려들었다.

미군은 강력한 공중 화력과 첨단무기, 차량 등에 의지한 탓에 도보 행군을 싫어하고 야간전투에 취약했다. 중공군은 이런 특징을 파악해 다양한 맞춤형 전술을 구사했다.

주요 작전은 기만과 우회’, ‘기습과 포위였다. 항일전쟁 당시 화력이 월등히 앞선 일본군과 싸울 때 활용한 전법이었다.

공중정찰에 발견되지 않을 정도로 매복과 위장술에 능한 중공군은 낮에 멋모르고 들어온 유엔군을 밤에 포위 공격을 해서 큰 성과를 거뒀다.

중공군은 19세기 아편전쟁과 청일전쟁, 의화단운동 등에서 연전연패한 청나라 군대와 전혀 달랐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장기간 겪으며 고도로 단련되고 다양한 전쟁 경험을 축적한 정예군으로 환골탈태했다.

세계 최강의 미군이 압록강과 두만강 점령을 목전에 두고 중공군에 밀려난 이유다.

중공군은 해·공군의 지원 없이 순수 육군만으로 참전했음에도 압록강과 청천강 일대에서 대승을 거두며 순식간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후 파죽지세로 남하하며 평양 탈환에 이어 38선을 넘어 195114일 서울까지 점령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연패 끝에 한강 이남으로 밀려난 1.4후퇴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포위망에 걸려들 때마다 무수한 인명피해를 냈다. 이 때문에 중공군의 작전을 폄훼해서 인해전술로 불렀으나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물론이고, 채명신, 백선엽 등 한국군 고위 장성들의 회고록을 봐도 중공군의 전투력은 매우 뛰어났다.

특정 지역으로 유엔군을 유인한 다음 우회기동으로 포위 섬멸하는 능력은 탁월했다.

유엔군은 유인책에 말려든 줄 모르고 무작정 덤벼들었다가 숱한 참변을 겪었다.

엄격한 군기를 세워 민간인 피해를 최대한 줄임으로써 민심을 획득한 대민심리전은 국군은 물론, 유엔군을 능가했다.

게릴라전과 함께 전면전도 구사해 큰 성공을 거뒀다. 항일전쟁 과 국공내전에서 터득한 노하우다.

맥아더 사령부는 중공군의 전투력을 무시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에는 천하무적으로 행세할 정도로 오만했다.

맥아더는 감청과 공중정찰을 통해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 사실을 알았으나 애써 무시했다.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내고 귀국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마저 했다.

하지만 여러 부대로 쪼개져서 압록강을 향해 무작정 북상하던 미군은 막상 중공군과 맞붙었을 때는 혼비백산했다. 이들의 전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강했기 때문이다.

서부전선의 청천강 일대에서 중공군 23만명은 유엔군(8+한국군+터키군) 25만 명을 상대로 완승했다.

동부전선의 장진호 전투에서도 미 해병 약 1만 명이 중공군에 포위돼 막대한 희생 끝에 흥남으로 간신히 탈출했다.

미 해병은 영하 30~40도의 혹한 날씨에 하루 수십km를 행군하며 철수하느라 전체 병력의 약 40%가 동상과 질병 등에 걸렸다.

중공군은 유엔군의 크리스마스 공세에 반격한 지 열흘만인 126일 평양을 탈환하고 12월 말에는 개성을 점령했다. 이로써 한국전쟁은 원점으로 회귀했다.

19514월에는 만주 핵 폭격 문제로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던 맥아더가 해임되면서 휴전 분위기가 조성됐다. 트루먼이 정전을 희망한 데다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매슈 리지웨이가 195012월 교통사고로 숨진 월턴 워커의 후임 미 8군 사령관에 임명된 데 이어 맥아더의 유엔군 지휘봉까지 넘겨받으면서 전세는 팽팽해졌다.

분산된 유엔군 부대를 통합해 중공군의 밀집 공격을 막아내고 포병 비중을 크게 늘린 덕분이다. 중공군은 지평리와 원주에서 대패하면서 남진을 멈추게 된다.

이후 양측은 38선 일대에서 지루한 공방전을 거듭하다가 1953년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승자도 패자도 없이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만 낸 채 포성이 멎었다.

한국전에서 중공군은 약 40만 명이 죽고 486천여 명이 부상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항미원조의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고 자평한다.

중국의 소설가 루쉰의 명저 아Q정전(Q正傳) 주인공의 정신승리법의 판박이다.

 

중공군 처음과 마지막 상대는 미군 아닌 한국군

중국 바이두백과는 한국전이 북한 남침으로 시작됐다고 인정하면서도 미군은 침략자로 규정한다. 미군이 38도선 이남에 머무르지 않고 북진했다는 이유에서다.

중국은 한국전을 두 시기로 구분한다. 북한군이 단독으로 전쟁을 감행한 때를 조선전쟁이라고 부르고 중공군 참전 시기는 항미원조 전쟁으로 칭한다.

중국이 전쟁 이전에 이미 남침 지원을 약속했고 참전 이후 미군뿐만 아니라 국군과 무수한 전투를 치렀다는 점에서 항미원조는 허구이다.

중국은 6.25전쟁 발발 이전부터 북한과 긴밀한 협조를 취하며 전쟁을 지원했다.

미군이 참전한 19507월에는 남만주 일대를 관할하는 동북변방군을 창설했다. 북한군 지원을 염두에 두고 한반도와 가까운 곳에 군대를 편성했다.

국공내전 기간 동북 3성에서 종횡무진을 했던 제13병단을 주축으로 하는 이 부대의 병력은 약 25만 명에 달했다.

풍부한 전투경험과 조직력을 갖춘 덕에 인천상륙작전 이후 맥없이 무너지던 북한군의 지원 요청을 받고 곧바로 실전에 투입될 수 있었다.

동북변방군이 창설 3개월 만인 19501018일 압록강을 건너면서 6.25전쟁은 국제전 양상으로 바뀐다.

참전 명분은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돕고 가족과 나라를 보호한다는 뜻의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이었다.

항미원조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부대 이름은 동북변방군 대신 중국인민지원군으로 바꾸었다.

중국인민해방군 소속 정규군을 제국주의 미군의 침략을 받은 북한을 자발적으로 도우려는 민병대인 것처럼 위장했다. 유엔군과 직접 대결하는 부담을 피하려는 꼼수였다.

중공군은 19501124일 청천강 일대에서 참전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 전투를 벌이면서 실체를 드러낸다.

유엔군(8+한국군+터키군) 25만명을 상대하면서 대부분 병력을 국군 쪽으로 집결시켜 공격했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국군을 겨냥한 이 작전은 성공했다.

국군이 무너지면서 유엔군 전선이 뚫리자 중공군의 의도대로 미 8군과 터키군이 도미노처럼 붕괴했다. 이때 시작된 퇴각이 1.4후퇴로 이어졌다.

이듬해 2월 동부전선에서도 중공군은 미군 화력을 피해 국군 8사단을 집중하여 공격함으로써 궤멸시켰다.

그해 4월 임진강 전투와 가평 전투에서도 한국군이 표적이었다. 전선의 가장 약한 고리를 끊으려는 속셈에서다.

국군이 전쟁 초반에 훈련과 전략 부족 등으로 중공군에 연패했으나 사단급 이상 전술훈련을 끝낸 1951년부터는 전쟁 양상이 달라졌다.

중공군이 엄청난 장비와 병력을 동원했음에도 국군을 쉽게 이기지 못했다.

백마고지와 퀸·노리·베티고지, 금성, 도솔산 등지에서는 국군이 승리했다.

6·25전쟁의 마지막 전투로 기록된 425고지전투도 중공군과 국군의 싸움이었다.

1953720~27일 국군 7사단 예하 1개 대대와 중공군 135사단이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일대 425고지에서 벌인 전투다.

국군이 화천발전소를 차지하려고 벌인 이 전투의 승리 덕분에 휴전선이 35나 북상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950여 명이 사살되고 국군도 160명 전사했다.

중공군이 6.25전쟁에서 대규모 전투의 처음과 마지막을 국군과 치렀다는 점에서 미국 침략군에 대항했다는 항미원조의 정당성은 사라진다.

휴전협정이 임박한 1953719일 벌어진 금성전투를 중국이 기념하는 것도 항미원조 취지에 어긋난다.

중공군 23만 명이 강원도 금성지구에서 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27216명이 죽고 38700명이 부상했지만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당시 한국군은 14373명을 잃어가며 약 4km 밀려났으나 철원 평야와 화천군은 끝내 사수했다.

그럼에도 중국은 문화대혁명기에 기습백호단이라는 제목의 경극과 영화를 만들어 금성전투를 기념했다. 상대가 국군 최정예 부대인 수도사단이었기 때문이다. 백호는 수도사단 백호 연대의 부대 마크다.

 

중공군 70%는 비공산계열...신분세탁 위해 참전

파병 군인들의 면면을 보면 항미원조라는 명분을 잃게 된다. 개인 영달과 생계유지가 주된 참전 동기였기 때문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과정을 수료한 첸줘(陳卓)의 논문에 중공군의 참전과 동원 유형 등이 자세히 소개됐다.

참전은 안보 외에 공산 정권의 내치 목적에서 결정됐다. 반혁명분자 진압과 토지개혁운동 등을 강화하는 데 한국전을 적극 활용했다.

참전 군인들의 약 70%1949년까지 공산군과 싸운 국민군 소속이었다. 이들은 공산당 정권에서 출신 성분을 세탁하고 전공을 세워 진급하려고 참전했다.

지방정부가 징병한 군인들은 대부분 빈민 출신이었다. 이들은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을 위해 한국전에 지원했다.

1952년 중국의 1인당 GDP54달러였는데 일반 병사의 연간 보조금은 그보다 훨씬 많은 116.9달러였다.

따라서 6.25전쟁 파병 부대는 미국 침략에 맞서 북한을 도우려고 지원한 의용군이 아니라는 게 이 논문의 결론이다.

 

마오쩌둥 6.25전쟁 파병은 예방타격

중공군은 195051일 하이난 점령에 이어 10월에는 국민당 정부가 피신한 타이완을 침공해 중국을 완전히 통일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6.25전쟁 직후 미 해군 7함대가 대만해협에 긴급 배치되면서 대만 침공이 무산되자 공격 목표를 한반도로 바꾸고 전황을 예의주시했다.

다만, 건국한 지 1년도 안 돼 국가적 난제가 산적한 상황이어서 파병에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북한군에 불리해졌을 때는 태도가 달라졌다. 참전을 염두에 두고 명분 쌓기에 나섰다.

마오쩌둥은 조선전쟁은 내전이므로 국제연합이나 미국 등 외부세력의 개입에 반대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내전 상황에서 남조선군이 38선을 넘을 수 있으나 유엔군은 안된다.”면서 유엔군의 북진은 중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거침없이 진군하자 중공군은 참전을 굳히게 된다.

미군 전투기들이 북·중 국경 영공을 수시로 침범하면서 연변 일대를 오폭한 것도 이런 결심을 키운 요인이다.

유엔군이 북한뿐만 아니라 자국까지 노리는 것으로 의심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이 지원을 요청하자 중국 지도부는 파병 문제를 본격 논의했다.

마오쩌둥은 순망치한을 거론하며 "중국 본토에서 싸우느니 조선에서 싸우는 게 낫다."라며 주전론을 폈다.

입술인 한반도를 빼앗기면 치아인 요동 지역이 위험해지니 영내 방어보다 국외 공격에 나서자는 논리였다.

공격 징후가 없을지라도 위협을 사전에 제거하려는 일종의 예방타격(preventive strike)이다.

저우언라이는 "유엔군이 북중 국경 지대에서 북진을 멈출지도 모르니 개입은 자제하고 상황을 지켜보자."는 신중론을 폈다.

한중 국경을 관할하는 제4야전군 사령관 린뱌오는 아예 비관론을 제시했다. 미국을 이기기 힘들다는 이유에서다.

양론이 갈라진 상황에서 펑더화이와 주더가 마오쩌둥에 힘을 실어주면서 108일 참전이 결정된다.

이들은 "미국이 북한을 점령하면 국경을 마주하게 돼 안보 위협에 직면한다. 신중한 작전을 세운다면 승산이 충분하다."고 조언했다.

소련에서 경제·군사 원조를 얻으려면 북한군을 지원하라는 스탈린의 요구도 파병에 영향을 미쳤다.

결국 참전은 항미원조 차원이 아니라 자국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이뤄진 셈이다.

 

중공군 38선 침범함으로써 파병 명분 스스로 파기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위장한 동북변방군이 출정을 앞두고 사령관이 전격 교체됐다.

참전을 반대한 린뱌오를 제치고 펑더화이가 지휘봉을 잡게 된 것이다.

인민지원군은 압록강을 건너 며칠 동안 북한 주요지역으로 잠입했다가 북진하던 유엔군에 대대적인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낮게 본 맥아더 사령부의 오판 탓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유엔군은 혹한 날씨와 험준한 산악지형, 보급 차질 등으로 극도로 지친 상태에서 병력을 분산한 탓에 중공군의 포위망에 쉽게 걸려들었다.

펑더화이는 유엔군 후방으로 우회한 다음 전후방을 협공하는 전술을 주로 구사해 전세를 뒤집었다.

국군도 압록강까지 진격해 강변인 초산에 태극기를 꽂았으나 중공군의 덫에 걸려 막대한 인명피해를 냈다.

유엔군은 방어태세로 전환하고 청천강 일대에서 공산군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그것마저 실패했다.

이후 중공군은 유엔군을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1.4후퇴 이후에는 한반도 전역을 공산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에서 서울 점령에 그치지 않고 남진을 계속했다.

이로써 6.25 참전은 항미원조가 아니라 침략전쟁이었음을 자인하는 꼴이 됐다.

유엔군의 38선 돌파 시점을 기준으로 조선전쟁과 침략전쟁으로 구분한 게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유엔군이 1.4후퇴 당시 썰물처럼 퇴각했을 때 펑더화이는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남진 여부를 놓고 김일성과 의견 충돌을 빚기도 했다.

펑더화이는 38선에서 전선을 유지한다는 기본 방침을 고수하려고 했고 김일성은 남진을 압박했다.

남한으로 진격하면 참전 명분을 잃게 되고 공중 지원과 보급이 끊겨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고 펑더화이는 판단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남진을 강행하라고 명령함으로써 개성에서 잠시 주춤하던 중공군은 1231일 대공세에 나서 38선을 넘게 된다. 이로써 38선 방어 명분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유엔군이 후퇴하자 중공군과 인민군은 14일 서울에 재입성했다.

중공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대담하게 이남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가평 등지에서 유엔군의 방어선에 막혀 19513월 서울을 내주고 38선 이북으로 퇴각하게 된다.

북한과 달리 남한에서는 미군이 압도적인 제공권을 장악한 데다가 평지가 많아 매복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일부 공군이 참전했지만 북한 방어에 주력한 탓에 38선 이남에서는 중공군을 지원하지 못했다. 펑더화이의 우려가 현실화한 것이다.

이후 한국전쟁은 1차 세계대전처럼 진지전 양상으로 바뀌어 1953년 정전협정 때까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1951610일부터 시작한 휴전협상에서도 항미원조의 허구성이 드러난다.

유엔군이 붙잡아 관리한 포로 가운데 대다수 반공포로가 중국이나 북한 송환을 거부했다.

강제 징집되거나 국공내전 당시 중공군에 항복한 국민당 군 소속이었던 이들이 송환을 반대한 것은 자발적으로 참전하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이들의 처리 문제를 놓고 합의점을 찾지 못해 협상이 난항을 거듭했다.

유엔군은 포로의 자유의사를 존중하자고 주장했고 공산군은 무조건 자국 송환을 요구했다.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과 협의 없이 반공포로를 전원 석방해버렸다.

이들은 일단 중립국인 인도로 갔다가 자유의사에 따라 한국이나 대만에 정착했으며 일부는 제3국행을 택했다.

 

중공군 참전은 국공내전 채무 상환목적

중공의 참전에는 북한에 대한 이념적 연대 의지와 함께 보은의 의미도 작용했다.

1945~1949년 국공내전 당시 북한이 중국 공산당을 크게 도운 사실이 서적 중국 동북해방전쟁을 도와를 통해 드러났다.

김일성의 업적을 기록한 이 책에 따르면 1945년 조선이 해방됐지만 중국에서는 내전이 벌어져 공산당이 미국을 등에 업은 국민당에 밀려 크게 고전했다.

국민당이 병력 430만명을 거느리고 전체 인구의 70% 지역을 차지한 데 반해 공산당이 장악한 곳은 30%에 그쳤다.

당시 김일성은 소련이 중국을 도와줄 수 없는 사실을 알고 항일유격대 지휘관들을 옌지(延吉)에 보내 군정대학을 세워 장교 3700여 명을 양성했다.

연변에서는 길동보안사령부를 창설해 연길과 왕청, 화룡, 훈춘, 돈화 등지의 연대급 부대를 지휘토록 했다. 전체 병력은 28천여 명에 달했다.

북한은 총기류 10만 정과 탄약은 물론, 면직물과 전기까지 지원했다.

북한의 헌신적인 도움 덕에 중공군이 동북해방전쟁(국공내전)의 전세를 역전할 수 있었다.

19466293차 국공내전 이후에는 조선족 부대가 승리를 주도했다고 이 책은 전했다.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수세에 몰린 1946~1948년 당시 북한은 공산당 고위 인사의 가족과 부상병 수용도 도와줬다.

만주에서 국민당군에 쫓긴 중공군은 북한을 피난처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48년 만주 전역에서 거둔 승리가 국공내전의 분수령이 됐다는 점에서 중국은 유엔군에 밀리는 북한을 방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정과 김두봉 등 옌안 시절 중국 공산당과 함께 항일투쟁을 벌인 조선인들이 북한군 지도부에 대거 포진한 것도 참전에 영향을 미쳤다.

중국은 조선족 밀집지역인 연변에 북한이 망명정부를 세운다면 소련이 해당 지역을 북한에 할양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했다.

다만, 유엔군을 직접 맞대응한다면 유엔의 인정을 받으려던 중국의 노력이 수포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딜레마였다.

궁여지책으로 제국주의에 시달리는 조선 인민을 가엾이 여겨 스스로 지원한 지원병이라는 꼼수를 도출해냈다. 국공내전 당시 북한에 진 빚을 갚기 위한 그들 나름의 묘수였다.

 

중공군과 싸운 15개 참전국도 침략국?

중국은 6·25를 항미원조전쟁으로 부르며 미국의 침략성을 부각했다.

북한이 마오쩌둥의 지원 약속을 믿고 침공한 사실을 숨기고 대한민국을 돕기 위한 미국의 참전을 제국주의 침략으로 매도하기 위한 술책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을 보면 항미원조가 잘못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안보리는 북한이 기습 남침한 1950625일부터 3개 결의안을 채택했다.

첫 결의안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즉각적인 38선 이북 철수를 요구했다.

이후 두 개 결의안은 세계 각국이 침략당한 대한민국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라는 권고와 유엔군사령부 창설 결정을 담았다.

유엔군 16개국이 이런 절차를 밟아 참전했다는 점에서 국제법상 하자가 없다. 미군도 유엔군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침략군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6·25 당시 한국을 도운 나라는 모두 60개 국가다. 16개 파병국과 6개 의료지원국 외에 38개국은 물자를 제공했다.

북한 침략에 맞서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려고 온 세계가 힘을 합친 것이다.

시진핑의 주장대로라면 안보리 결의에 따라 미국과 공조하며 한국을 도운 59개 나라도 제국주의 침략국이 된다. 전형적인 적반하장이다.

중공군은 유엔 결의에 반해서 침략군을 도왔다는 점에서 국제법을 위반했다.

중국은 6·25전쟁 직후 소련과 참전 문제를 논의하면서 항공지원만 해주면 압록강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가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이때는 미군이 북한군에 밀려 남쪽으로 퇴각했다는 점에서 침략군에 맞서 참전했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항미원조는 1950년 김일성의 발언을 옹호하려는 궤변일 뿐 이다.

김일성은 6.25전쟁을 이승만 역도를 타도하는 통일전쟁으로 규정했다가 미군이 개입하자 1950717일 전쟁 성격을 바꿔버렸다.

조선 민족을 침공한 미 제국주의자에 대항하는 민족해방전쟁으로 전환한 것이다. 중국과 소련에 전쟁 개입 명분을 제공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중공군 병력 북한군의 2~3...지휘권도 장악.

휴전협정 직전 북한 주둔 중국군 병력은 40~60만 명으로 북한군 20만 명보다 2~3배나 많았다. 참전 연인원은 1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유엔군 병력 90만명 중 국군이 60만 명인 것과 대조적이다.

작전지휘권도 중공군이 행사했다. 참전 초기에는 중공군과 북한군이 별도 지휘권을 행사한 탓에 많은 문제점이 드러났다.

북한군이 중공군을 적군으로 오인해서 도로를 봉쇄하거나 공격했다.

1950114일에는 미 제24사단을 포위 공격하는 중공군을 향해 북한군 탱크사단이 공격하는 바람에 미군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 일이 벌어졌다.

급기야 펑더화이는 김일성과 마오쩌둥에게 명령이 여러 곳에서 나와 지휘체계가 어수선하다.”라며 작전권 통합을 제안했다.

이후 김일성이 19501116일 북경에 가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등과 협의해 다음달 상순 조중연합사령부(약칭 연사)를 창설하게 된다.

연사는 양국 군대의 일사불란한 작전지휘권 행사를 위한 비공개 기구다.

모든 작전 범위와 전선 활동은 물론, 철도 수송과 수리 명령을 연사가 내리고 후방 군 동원과 훈련, 경비 등은 북한이 맡았다.

중공군 병력이 북한을 도우려던 의용군이었다면 북한군의 지휘 통제를 받았어야 했는데 실상은 정반대였다.

펑더화이가 연사 사령관겸 정치위원을 차지하고 부사령관과 부정치위원 자리는 북한에 돌아갔다.

이후 김일성은 군사 지휘권을 놓게 된다. 북한군 제3군단은 중공군 제9병단 주변에 배치돼 연사의 통제를 받았다.

북한군은 6.25전쟁 초기 약 6개월만 독자 작전권을 가졌을 뿐 그 이후에는 중공군이 전쟁을 주도했고 김일성 군대는 그저 부속품에 불과했다.

공산권의 실질적인 전략과 전술은 중공군 부사령관 덩화의 머리에서 나왔다.

김일성이 작전지휘권을 선뜻 포기한 것은 중국인민지원군이 미군과 맞대결할 정도의 전투력과 기율을 갖춘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지원군이 단순히 사회주의 연대의식으로 뭉친 의용군에 불과했다면 작전권을 넘겼을 리 만무했을 것이다.

인민지원군 지도부는 오랜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치면서 확고한 전투 의지와 탁월한 전쟁 역량을 겸비했다.

지원군이 병력 숫자만 믿고 무모하게 공격하는 원시 군대로 폄훼하는 인해전술이라는 용어가 한때 나돌았으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인해전술은 어둠 속에서 굉음을 울리며 끊임없이 밀려드는 중공군에 겁먹은 유엔군과 국군의 공포를 담은 언어였다.

중공군은 낮에 깊은 계곡 등에 은신했다가 밤에 기습을 감행하면서 피리와 꽹과리를 동원해 공포 분위기를 극대화하는 데 능했다.

첨단 장비와 화력, 공중 지원 등의 절대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주로 어둠을 타고 싸움을 벌여 밤의 군대로 불린 중공군의 매복과 우회·포위 전술은 미군을 능가했다.

195010월 말부터 그해 12월 중순까지 이뤄진 전투는 거의중공군의 완승이었다.

당시 압록강 주변에 태극기와 유엔기를 꼽고 전쟁 승리를 선언하려던 미군의 북진은 도중에 차단되고 국군은 2개 군단을 잃는 참사를 겪었다.

한국전은 사회주의 국가로 바뀐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싸움 기술을 처음 선보여 대성공을 거둔 무대였다.

미국 침략에 맞서기 위해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군대였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공군의 탁월한 심리전은 정규군 입증.

중공군은 미국과 싸우고 북한을 도와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19501019일 압록강을 넘었다.

당시 마오쩌둥은 미국을 비롯한 모든 제국주의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며 승전을 장담했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군을 경멸하는 듯한 이 발언은 중공군의 사기 앙양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허풍은 아니었다.

공중 전력과 첨단 화기 등에서는 절대적 열세였지만 게릴라전과 심리전은 미군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은 평안북도와 함경북도 일대에서 덫을 형성해 기다렸다가 미군을 유인해 포로로 잡은 다음 수시로 풀어줬다.

중국 군대는 머잖아 귀국한다는 역정보를 흘려서 유엔군의 판단을 흐리도록 하려는 심리전의 일환이었다.

중공군은 대민심리전에서도 탁월했다. 침략국인 북한을 도왔는데도 한국인들에게 비교적 좋은 인상을 심어 준 이유다.

심리전의 비결은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 군대의 토벌전에서 생존하기 위해 구사한 삼대기율 팔항주의.

삼대기율은 지휘관 명령에 절대 복종, 민중의 바늘 하나 실 한 올 소유도 금지, 모든 노획품의 공유화 등이다.

팔항주의는 부드러운 말투 공평 거래 빌린 물건 반환 손상 물건 변상 구타·욕설 금지 농작물 훼손 금지 부녀자 희롱 금지 포로 학대 금지 등이다.

마오쩌둥은 당장 무력으로 미국을 굴복시킬 수는 없었으나 공산주의 중국에 우호적인 인사를 많이 확보해두면 장기적으로 큰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 고도의 심리전을 구사했다.

마오쩌둥이 포로는 종전 후 송환해야 한다. 훗날 우리 선전원이라는 생각으로 잘 대우해라. 중국의 전통문화를 제대로 습득한 사람에게 관리를 맡겨라.”고 지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중공군은 보급이 끊기는 극한 상황에서도 삼대기율과 팔항주의를 비교적 잘 실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포로 관리 총책임을 맡은 두핑은 다양한 선무공작을 펼쳤다.

미군이나 영국군 등 서방 포로에게 미인계를 써가며 각종 이념 세뇌를 하면서 중국에 눌러앉도록 했다. 상대적으로 쓸모가 덜한 국군 포로는 북한군에 넘겼다.

중공군이 규율을 항상 엄수한 것은 아니었다. 포로 학대나 학살 사례도 적잖았다.

생김새가 확연히 다른 터키군 포로를 매우 가혹하게 대했다고 한다.

종교를 불온시한 탓에 감시병까지 배치해가며 유엔군 포로의 종교행사를 철저히 막았다.

터키군 포로들은 이슬람 율법에 따라 하루 5번씩 기도하다가 가혹행위를 당하기도 했다.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행사를 원천봉쇄하고 몇몇이 모이는 것조차 금지했다.

모든 포로는 출신 국가와 무관하게 공산주의 이념을 강요받았다.

이는 명백한 제네바 협정 위반이자 중공군의 팔항주의에도 어긋난다.

일부 범죄와 일탈이 발생했음에도 전반적으로 중공군의 규율 준수는 대체로 양호했다.

의료지원은 물론,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악조건에서도 군율을 잘 지켰다는 점에서 중공군은 인민지원군의 탈을 쓴 정규군임이 분명하다.

 

항미원조 선전에 혈안...기념관·열사능원 짓고 영화·드라마·다큐 제작

중국은 6.25전쟁의 침략성을 부정하기 위해 국가 차원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고 있다.

랴오닝성 선양에 1951년 건립된 '항미원조 열사능원'은 대표적인 역사 왜곡 시설이다.

한국전쟁에서 숨진 중공군의 유해를 안장한 능원에는 시기별 전과를 보여주는 전시실이 마련됐다.

전시관 초입에는 "한반도 내전이 일어나자 미국이 즉각 무장간섭에 나서 북한에 전면전을 벌였다. 북한의 요청으로 중국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넜다."라고 적혀있다.

미국 때문에 중국 접경에 피해가 생겼고 참전 후 29개월간 중국인 19만여 명의 희생 끝에 승리했다는 문구도 있다.

전시실에는 철의 삼각지대(철원-김화-평강)에서 벌어진 상감령(上甘嶺) 전투를 위한 별도 공간이 있다. 항미원조 전쟁의 최대 승리로 선전하는 전투다.

전투명은 삼각고지와 저격능선 사이의 상감령이라는 고개에서 따왔다.

중공군과 유엔군이 이곳에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내며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은 맞지만 어느쪽도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중국은 한국전쟁 역사를 자국의 입맛대로 해석한 영화 상감령을 1956년 제작해 수시로 상영함으로써 국민 세뇌에 활용했다.

미국의 제재를 받았던 통신장비업체인 화웨이의 런정페이 회장도 이 영화에 세뇌된 듯 우수 인재들을 이끌고 상감령으로 진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열사능원 전시실은 외침에 저항한 중국 역사에서 한국전이 빛나는 한 페이지를 남겼다고 자평할 뿐 죄상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기습남침한 북한을 도와 전쟁이 길어지면서 약 250만명이 숨진 참변의 책임을 미국 측에 돌리려는 술수로 읽힌다.

남한에서 전사해 파주 적군묘지에 묻혔던 중공군 유해도 박근혜 정부 들어 이곳으로 이장됐다.

중국은 이들 유해를 인수할 당시 성대한 추도행사를 열어 안장했다.

1958년에는 단둥에 항미원조운동 기념관을 세웠다. 인민지원군이 19501019일 압록강 철교를 건너 북한으로 진입한 것을 기념하는 곳이다.

6개 관람 구역과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주요 전투장면 8개를 재현한 전시장 등으로 구성된다.

이 기념관은 제국주의와 내전에 시달리던 중국이 건국 1년 만에 세계 최강국과 싸워 전쟁을 끝냈다고 선전한다.

시진핑 주석이 집권한 이후 중국몽과 대국굴기를 내세우면서 한국전쟁 관련 역사 왜곡과 날조는 기승을 부렸다.

참전 70주년인 20201025일을 전후한 시기에 선전활동이 절정을 이뤘다.

19501025일은 중공군이 한국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둔 날이다.

북한군의 기습 남침에 무방비로 당한 국군이 상당수 병력을 급조한 탓에 전투경험과 훈련이 부족한 점을 노려 참전 1호 표적으로 삼아 승리한 날을 항미원조 기념일로 삼았다.

기념일 전후해 6·25전쟁 영화와 드라마, 다큐멘터리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항미원조 정신을 널리 알려 반미감정을 고취하려는 취지에서다.

주요 영화는 최장수 작품인 상감령과 미 공군과 대결하는 장공비익, 전사한 오빠를 잃고도 전장을 떠나지 않은 여성을 다룬 영웅아녀 등이었다.

애국심을 고취하는 노래로 인기를 끈 나의 조국은 영화 상감령의 주제곡이다.

다큐멘터리 빙혈장진호는 195011월 함경남도 장진호 전투에서 승리한 중공군을 미화한 작품이다.

한국전쟁을 왜곡하거나 미화한 전쟁 영웅들이 교과서에 실리고 어린이용 에니메이션에도 등장했다.

영웅담은 승전 성과를 한껏 부풀리고 패전 피해는 최대한 줄이는 방식으로 꾸며졌다.

그 결과 주요 전과나 사상자 기록이 중국과 한국에서 큰 격차를 보인다. 2~3배 차이는 보통이다.

백마고지 전투 평가도 완전히 상반된다. 국군이 대승을 거뒀다고 자랑하지만 중국은 무승부라고 우긴다.

중국은 한국전의 진실을 영원히 은폐하려는 듯 전쟁 관련 자료를 좀처럼 공개하지 않는다.

북한의 남침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소련의 비밀문서가 1990년대에 대부분 공개된 것과 대조적이다.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이 1994년 김영삼 대통령에게 제공한 외교문서와 후르시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자서전 등을 보면 북한의 남침 과정을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48번이나 남침 승인을 요청받은 스탈인은 미국 개입 등을 이유로 거절하다가 미국의 에치슨라인 선언 이후에는 전쟁 지원으로 급선회했다.

김일성에게 남침 지원을 약속한 것에 그치지 않고 마오쩌둥에게 참전을 요구하기도 했다.

중국은 북한에 은인의 나라일 수 있지만 한국에는 명백한 침략국인데도 여태껏 반성이나 사과는커녕 참전을 되레 자랑할 정도로 후안무치했다.

 

두 얼굴중공군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 땐 정규군

20116월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창건 90돌 자료전에 전시된 한 문서에는 항미원조가 허구임을 일깨워주는 단서가 있다.

마오쩌둥이 1950108일 직접 작성해 펑더화이, 가오강, 훙쉐즈 등 군 지휘부에 보낸 한국전쟁 파병 명령서다.

파병 군대의 명칭은 인민지원군으로 표기했다. 支援軍이라고 썼다가 志願軍으로 고쳤다. 돕는다는 뜻의 支援과 자원한다는 뜻의 志願은 음이 같지만 의미는 다르다.

국가 차원에서 북한을 돕는다는 뜻으로 파병 군대 이름을 지으려다 부적절하다는 일부 지적에 따라 명칭을 변경했다고 한다.

정규군으로서 북한을 지원하면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가 될 것으로 염려해 비정부 성격을 갖는 志願軍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펑더화이는 동북변방군사령관이 아닌 인민지원군사령관의 모자를 쓰고 한반도로 출병했다.

국가 상비군이 아닌 인민의 자발적·개인적 참전으로 위장하기 위해서다.

중공군은 한국전 정전 협상에서도 위장술을 유지했다. 인민지원군은 국가의 군대가 아니므로 철수할 필요가 없다는 억지를 부렸다.

다만, 연합군이 먼저 철수하면 지원군에게 귀향을 최대한 설득하겠다는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1953727일 정전협정 당시 펑더화이는 끝내 인민지원군 사령원 자격으로 서명했다.

지원군은 1958년까지 북한에 주둔하다 점차 철수해 중국 정규군에 흡수됐다는 점에서 이들의 주장은 허구다.

중국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참여하겠다는 입장을 밝힐 때는 정전협정 서명국 지위를 거론한다. 전형적인 야누스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정상적인 국가의 참전이라는 사실을 공식 인정하게 되면 내정간섭 논란을 일으키는 자충수가 된다.

중국이 입버릇처럼 강조해온 우리는 원래부터 다른 나라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외교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원칙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중국은 2천 년 이상 주변국을 속국으로 삼아 내정에 깊숙이 관여한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특히 항미원조는 1492년 명나라가 오로지 조선을 도와주려고 한반도에서 왜군과 싸웠다며 보은을 강요할 때 사용한 항왜원조의 변종 언어다.

명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며 자국을 침공할 낌새를 보이자 서둘러 파병했다.

요동 벌판보다 조선의 산악지대에서 왜군과 싸우는 것이 유리한데다 자국을 전쟁터로 만들지 않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중공군의 6.25전쟁 참전 상황도 임진왜란 때와 비슷했다. 유엔군이 38도선을 돌파해 평양을 거쳐 압록강으로 북진하자 자국 안보 위험 등을 고려해서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다.

전쟁 주체를 중국과 미국으로 설정한 항미원조는 최대 피해국인 한반도는 단지 속국이자 하수인일 뿐이라는 중화주의 전통을 내포한 언어다.

사드 배치와 북핵, 미세먼지, 코로나19 등에서 보여준 중국의 고압적인 태도도 중화주의의 반영이다.  

중국의 역사 왜곡과 패권주의 경향은 경제력과 군사력이 커지면서 더욱 심해질 것이다. 중국인의 뼛속 깊이 각인된 우월주의와 선민의식은 심각한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다. 아메리카 잔혹사와 히틀러의 인종청소를 촉발한 것도 아리아 우월주의였다.

중국은 수천 년 동안 보편·호혜적인 선린의 기간은 매우 짧았고 대부분 주변국에 거칠고 폭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부국강병과 함께 동맹외교를 강화해야 한다. 그것만이 국민 생명과 국가 주권을 지켜낼 수 있는 방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