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무수한 한인들이 만주에서 중국인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었다
중국 군부가 일제의 사주를 받아 한인들을 무더기로 붙잡아 조선총독부에 넘겨 사형이나 고문·투옥을 당하도록 했다.
중국공산당이 항일투쟁을 벌이던 한인 공산당원들에게 일제 부역자라는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씌워 대거 처형하기도 했다.
이념의 좌우를 막론하고 중화주의 유전자가 뼛속 깊이 박힌 중국인들이 한인의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가볍게 여긴 결과다.
일제 강점기 재중 한인 사냥은 만주 군벌 장쭤린(1875~1928년)에서 시작됐다. 장쭤린의 부하들은 1925년 6월 조선총독부의 미쓰야 경무국장과 한국인 단속 협약(일명 미쓰야협약)을 맺어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미쓰야협약 내용은 한인 호구 조사, 무기 휴대자의 조선 입국 차단, 항일단체 해산, 사냥총을 제외한 농민의 무기류 몰수, 지명 수배 항일 지도자 체포 등이다.
일제가 중국 군벌을 매수해 한인 소탕전을 벌인 것은 항일투쟁의 근거지로 활용된 만주 일대가 워낙 방대한 데다 자국 영토가 아니어서 단속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만주에서는 1919년 3ㆍ1운동을 계기로 여러 한인 독립군 부대가 창설돼 한·만 접경지대를 중심으로 활발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독립군 부대는 국내에서 망명한 청년들을 받아들여 병력을 늘리고 국내외에서 자금을 모아 최신식 무기를 사들여 전투력을 키웠다.
그 결과 국경을 넘어 조선총독부 관공서를 파괴하고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였으며 1920년 6월과 10월에는 봉오동과 청산리 정규전에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일제는 훈춘사건을 일으켜 반격에 나섰으나 독립군이 깊은 산속이나 중·소 국경지대로 피신함으로써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훈춘사건은 중국인 마적단을 매수해 훈춘 소재 일본 영사관을 방화하고 일본인 일가족을 살해한 사건을 일컫는다. 일제가 한국 독립군의 소행으로 몰아 소탕전을 펴기 위해 저지른 자작극이다.
일제는 독립군 추적이 무산되자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약 3~4개월 동안 한인촌을 돌며 남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부녀자는 겁탈했다. 이른바 간도참변(또는 경신참변)이다. 일본군이 지나간 마을은 모든 가옥이 불타 폐허로 바뀌었다.
일제는 간도참변 이후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병력을 대거 배치하고 간도 경찰력을 증원했음에도 독립군 활동이 계속되자 미쓰야협정을 통해 중국 군벌을 끌어들이는 이이제이 술책을 활용했다. 단속 실적에 비례해서 포상금을 늘리는 유인책도 제시했다.
중국 군인들은 포상금에 눈이 먼 나머지 한인에게 조금만 의심스러운 점이 발견돼도 체포해서 조선총독부에 넘겼다. 이들은 모진 고문 끝에 사형을 당하거나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항일운동가 색출을 빌미로 학교와 교회를 문 닫게 하고 한인 농민을 구타하거나 토지를 강탈하는 일도 빈발했다.
서울에서 발행된 월간지 ‘삼천리’의 1931년 6월호를 보면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1926년) 이래 금일까지 중국 군경이 삼시협약(미쓰야협약)을 이유로 조선인 독립단을 취체(단속)한다는 구실 아래 농가에 임검(불시검문)하여 금품을 강요하며 개인의 배를 살찌우는 일이 발호했다.”
미쓰야협약 이후 항일투쟁이 크게 위축됐다. 국내 진공 건수가 1924년 560건에서 1925년 270건, 1926년 69건, 1930년 3건 등으로 급감했다.
1927년 만주 길림에서 독립운동가 300여 명이 중국 군경에 체포된 길림사건도 미쓰야협약 때문에 벌어졌다.
중국 헌병은 한국 경제 침략의 총본산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1년 전 폭탄을 던지고 순국한 나석주 의사 추도회 단속을 일제로부터 요청받고 안창호를 비롯한 참가자 300여 명을 투옥했다.
일제의 사냥개 노릇을 하던 장쭤린은 1928년 6월 일본군이 폭탄을 설치한 열차를 타고 가다 폭사했다. 장쭤린은 만주지역 철도권을 넘겨달라는 일본의 요구를 거부했다가 암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쓰야협약은 만주사변 이듬해인 1932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수립되면서 실효성을 잃고 폐기됐다.
중국은 1996년 북한과 맺은 양자협정을 토대로 탈북자의 난민 요구를 거부한 채 강제 추방함으로써 이들이 북한에서 고문이나 처형을 당했다는 점에서 이 협정은 현대판 미쓰야협약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민생단사건은 문화혁명 전초전...조선인 항일투사 2천명 학살
만주에서 미쓰야협약 이후 항일을 이유로 숱한 한인들이 목숨을 잃었다면 1932~1937년 민생단사건에 엮인 한인 사회주의자들은 친일 누명으로 참변을 당했다.
민생단은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이듬해인 1932년 2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부사장이자 최남선의 매부인 박석윤이 용정에서 결성한 친일 정치단체다.
재만 조선인의 생활 안정 등을 표방한 민생단의 실제 임무는 만주사변 이후 중국인과 한인 사이에서 활발하게 진행된 항일연대 움직임을 무산시키는 것이었다.
중국공산당이 워낙 강력해서 별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창설 8개월 만에 해산할 정도로 활동이 미약했으나 재중 한인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한인 사회주의자들이 민생단과 연계해 공산혁명을 파괴하려고 중국공산당에 대거 잠입한 것으로 의심받아 무차별 학살을 당했다.
중국공산당이 인정하는 민생단 희생자만 500여 명에 달하고 실제 사망자는 약 2천명으로 추정된다.
간도특설대를 비롯한 일제 토벌대에 의해 숨진 한인 혁명가보다 민생단 희생자가 더 많다. 세상 물정에 어느 정도 눈을 뜬 간도 한인은 대부분 일제 간첩으로 몰려서 목숨을 잃었다.
처형 방식은 14~17세기 유럽에서 약 50만 명을 죽인 마녀사냥과 비슷했다. 마녀 식별 방식은 크게 4가지였다.
1단계는 눈물 시험이다. 마녀는 사악해서 눈물이 없다는 믿음에서 생겼다. 2단계는 바늘 시험이다. 마녀는 난교로 피를 소진하므로 바늘에 찔려도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한다. 3단계는 불에 달군 쇠로 지지거나 불 위를 걸을 수 있으면 마녀로 분류됐다. 신비한 힘을 갖기 때문이다.
4단계는 물 시험이다. 몸을 단단히 묶고 깊은 물에 떨어졌을 때 떠오르면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했다. 가라앉으면 혐의를 벗어난다.
결국 마녀로 지목되면 어떠한 경우에도 목숨을 잃게 된다. 유죄로 처형되거나 죽고 난 뒤에야 억울함이 입증되기 때문이다. 프랑스 백년전쟁의 영웅인 잔 다르크도 마녀사냥으로 죽었다.
민생단 사건은 1932년 8월 연길 농민협회 직원인 송노톨이 일본 헌병에 체포됐다가 1주일 만에 풀려나면서 시작됐다.
너무 일찍 석방된 것을 수상하게 여긴 중국공산당 동만주특별위원회(동만특위)가 2개월 뒤 일본군으로부터 송노톨이 일제 스파이라는 진술을 듣고 한인 소탕전을 벌이게 된다.
동만특위는 송노톨을 고문해서 민생단 간부 20여 명이 중국공산당에 잠입했다는 자백을 받고 당사자들을 처형한 것을 비롯해 불과 두 달 만에 200여 명을 학살했다.
그때만 해도 항일투쟁을 함께 했던 조선인과 중국인의 동지적 유대감 덕분에 숙청이 신중하게 이뤄졌으나 1933년 5월부터는 ‘묻지마 처형’으로 돌변했다.
훈춘유격대 정치위원이던 박두남이 중국공산당의 지령을 받아 간도를 순시하던 반경유를 사살한 뒤 일제에 투항하면서 한인 간첩설에 대한 막연한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당 안팎에서 위기를 맞은 처지였다. 당의 무오류성을 맹신한 당원들이 지도부 노선만 잘 따른다면 일제에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가 막상 토벌대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면서 당의 권위가 크게 실추됐다.
반경유는 당에 잠입한 일부 민생단원의 농간 탓에 당의 영도력이 훼손됐다며 당사자 색출을 위해 간도 순시에 나섰다가 살해됐다.
반경유의 판단에 반신반의하던 공산당 지도부는 피살사건을 계기로 민생단 침투설을 확신하고 대대적인 마녀사냥을 벌였다.
동만특위는 혁명대오를 흔들려는 간첩단을 처벌한다는 명분이 확보되자 색출 절차의 정당성은 아예 무시해버렸다. 한인 사회주의자 가운데 조그마한 꼬투리만 잡히면 누구나 간첩으로 몰려 목숨을 잃었다. 투철한 당성이나 혁명 성과는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밥을 먹을 때 물에 말거나 흘려도 민생단원으로 간주했다. 배탈이나 설사, 두통, 한숨, 고향 생각, 과잉 성실, 신세 한탄, 일제 감옥서 생환, 허름한 복장 등도 간첩의 증거로 활용됐다.
유럽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주로 여성이었다면 민생단사건에서는 반일의식이 투철한 대다수 남성이 처형됐다. 민족 해방과 평등사회 건설을 위해 일신의 영달을 버리고 혁명사업에 뛰어든 이들이 일제 간첩으로서 생을 마감하는 역설이 생겼다.
공산청년단 출신의 정필국은 일제의 대토벌로 어머니와 5형제를 잃고 공산혁명의 선봉에 섰다가 민생단 첩자로 몰려 목숨을 잃었다.
그는 집단 처형 당시 중상을 입은 채 간신히 살아남아 시체 더미를 헤치고 기어 나와 보초병들에게 공산혁명에 헌신할 기회를 달라고 애원했지만 끝내 자비는 없었다. 보초병들이 몽둥이로 마구 때려 숨통을 끊어버린 것이다.
항일유격대 지휘관이던 윤창범은 민생단 첩자로 찍혀 연행될 당시 도주했다가 나중에 자수했으나 누명을 벗지 못한 채 곧바로 처형됐다. 소설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도 일제 스파이로 몰려 조선인 동지의 손에 처형당했다.
동만특위가 민생단원 증거도 없이 막연한 의심만으로 간첩 규모를 예단한 탓에 광기 어린 폭주가 이뤄졌다.
중국공산당은 3·1운동과 1920년 간도참변 이후 일제에 투항하지 않은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 모자만 썼을 뿐 실상은 일본의 밀정이라고 단언했다.
이들은 반공사상이 강한 자본가나 지주, 부농 출신이어서 혁명대오를 망치려는 일제와 손잡았다는 게 중국공산당의 판단이었다.
민생단사건은 간도 일대 공산혁명을 둘러싸고 중국인과 조선인이 벌인 주도권 싸움이라는 분석도 있다.
간도는 중국 영토이지만 전체 주민의 70% 이상이 조선인이고 동만특위 소속 당원의 90%가 조선인이었다.
지리·경제·문화적으로 한반도와 가깝고 조선과 중국의 영유권 분쟁이 벌어진 역사 때문에 민족 갈등도 잠재된 곳이었다.
이런 특성을 갖는 간도에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단속을 피해 이주해온 한인들이 급증하자 중국인 공산주의자들이 위기의식을 느꼈다. 조선인들이 간도를 떼어내 조선에 합병시킬 수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거진 민생단사건은 중국인 공산주의자들의 주도권 장악과 간도 이탈 방지를 위해 악용됐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이 때문에 민생단 사건은 훗날 홍위병과 4인방이 주도한 문화혁명의 전초전 성격을 띠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공산당의 한인 사냥은 1936년 세계 공산화를 주도하던 코민테른의 개입으로 멈추게 된다. 코민테른은 동만특위에 한인 임의 체포나 구금, 살인을 금지했다. 코민테른은 조선 독립과 군대 창설도 지지했다.
그 덕분에 수감 상태에서 처형을 기다리던 민생단 연루자 100여 명이 석방된다. 간도 한인들은 민생단 간첩으로 의심받을까 두려워 한동안 금기어로 삼은 민족 해방과 조선 독립이라는 말도 조심스레 꺼낼 수 있게 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36년 5월 재만한인조국광복회가 결성됐다.
전세계 공산당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코민테른의 지시로 한인 독립단체가 설립됐지만 큰 성과는 내지 못했다.
중국공산당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은 민생단 밀정이라는 유령을 만들어 한인 탄압 도구로 활용한 탓에 항일 역량이 크게 위축됐기 때문이다.
항일전선에서 맹위를 떨친 독립투사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고 생존자들은 개죽음을 피하려고 독립운동을 중단했다.
일부 조선인은 본인의 혁명성을 강조함으로써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동족을 거짓으로 밀고해서 죽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조선인 사회주의자들끼리도 믿지 못해 의심하면서 분열하는 일이 허다했다.
코민테른의 도움으로 출범한 조국광복회는 독립군 부대를 운영하고 함경남도와 평안북도 등지에 지부를 건설하면서 활발한 항일투쟁을 벌이는 듯했으나 머잖아 사라지고 만다.
민생단사건으로 워낙 큰 내상을 입은 탓에 일제의 탄압을 견딜만한 체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 부대는 1937년 조국광복회와 연계해 함경북도 갑산군 보천보 지역을 습격했다. 북한에서 역사적인 항일 승전이라고 선전하는 보천보전투다.
150명의 항일연군은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 우체국 등 관공서를 공격하고 조선 인민 정부 수립을 호소하는 전단을 살포했다.
보천보전투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중 최대 성과로 북한에서 기록됐지만 실상은 완패였다. 일본 경찰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투입하고도 더 큰 인명 피해를 냈다.
당시 경찰관 5명만 근무한 보천보 주재소를 습격해서 민간인 여성 1명과 2세 여아를 죽였다.퇴각 과정에서는 일본 경찰추격대 30명과 교전을 벌여 25명이 숨지고 30명이 다쳤다. 반면 일본 경찰은 사망 7명, 부상 14명에 그쳤다.
보천보전투 여파는 민생단 악몽을 딛고 간신히 출범한 조국광복회를 강타했다.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한인 독립운동가 739명이 체포돼 188명이 기소되면서 조국광복회는 사실상 궤멸됐다.